미국에서 복지 정책을 약화시키기 위한 전략들: 인종차별과 성차별 (Think Progress)

Think Progress, “Racism, Sexism, And The 50-Year Campaign To Undermine The War On Poverty“, Igor Volsky, 2014.1,8

린든 존슨Lyndon Johnson이 ‘인류의 가장 오래된 적에 맞선 승리를 위한 대통령, 의회 그리고 국가의 헌신’을 약속하며, 국가가 ‘역사상 최초로’ 빈곤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음을 공표한 이래 50년이 흘렀습니다. 이후 몇 년 간 입법자들은 저소득층에 교육의 기회를, 노인에게 은퇴생활과 건강관리의 보장을, 배고픈 이에게 식량을 제공하며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사회적 안전망을 짜냈습니다.

1930년대와 40년대에는 뉴딜정책의 연방 프로그램들(1935년의 사회보장법과 여타 계획들)이 흑인인구를 배제한 채 백인 다수에게만 적용될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정치인이 복지정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과 시민권운동을 거치며 흑인에게도 복지 프로그램이 개방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그 프로그램들이 불필요한 낭비일 뿐이며 정부 의존도만 높인다고 주장하는 양측 정당 보수파들의 반격을 촉발했습니다.

1964년 이래로 오늘날까지도 보수파 지도자들은 빈곤층에 대한 공적 부조를 멈추기 위해 종종 인종차별적이며 성차별적인 주장을 적극 활용하여 존슨의 빈곤전쟁 프로그램들을 체계적으로 약화시켜왔습니다. 그들의 레토릭이 당장 그 프로그램들을 무효화시키지는 못했지만, 그것들의 기반을 조금씩 깎아내려 왔으며 정부의 적절한 역할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을 바꿔놓았습니다. 오늘날 워싱턴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몇몇 사례들을 포함, 사회복지 프로그램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공격이 어떻게 발전해왔는가에 알아봤습니다.

1960년대

1964년 국회는 경제기회법령을 통과시킴과 동시에 존슨 대통령의 ‘지역활동계획’ 운영을 위한 경제기회국을 설립했습니다. 곧이어 각 도시와 자치주에는, 빈곤층을 돕기 위해 설계된 모든 연방 및 주 프로그램들을 조직화해 운영하기 위한 ‘지역활동국’이 세워졌습니다. <가치 없는 빈민: 계속되는 빈곤과의 대치>의 저자이자 펜실베니아 대학 교수인 마이클 카츠Michael Katz에 따르면, 대부분의 공화당원들이 ‘이것은 돈 낭비일 뿐이고, 그 돈은 돼지고기처럼 아무데나 쓰일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에 반대했다고 합니다. 이 반대파 공화당원들에 맞서 존슨 대통령은, 그 어떤 연방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우려했지만 ‘가난한 백인 유권자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득으로 여겼던’ 남부 민주당원들에게 호소함으로써 그 프로그램을 통과시켰다고, 프린스턴 대학 역사학 교수 줄리안 질라이저는 말합니다. 또한 그는 “결국 초기 빈곤전쟁 정책들은 공화당이 아닌 그 주변에 의해 통과되었다”고 덧붙입니다.

이후 공화당 대선 후보 배리 골드워터는, 빈곤전쟁이 쓸데없는 프로그램들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하며 1964년 대선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 해 골드워터 선거운동을 도우며 전국을 순회하던 로날드 레이건은, 열띤 연설을 통해 이에 대해 간결히 언급했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정부가 국민을 통제하지 않고서는 시장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부는 폭력과 강압을 활용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선택의 시간’이라고 이름 붙은 이 연설에서 레이건은 당대 여성들의 역할변화에 사람들이 품고 있던 불안감을 적극 활용했고, 그들이 정부 보조금을 더 받기 위해 남편과 이혼하려 들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래는 연설문의 일부입니다.

지금,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빈곤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겁니까? 얼마 전 이 곳 로스 앤젤로스에서 판사 하나가 제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그가 말하길 젊은 여자 하나가 이혼을 하겠다며 그를 찾아왔었다고 하더군요. 그 여자는 여섯 아이들의 엄마였고, 일곱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습니다. 판사의 질문에 따라 그녀는 남편이 한 달에 250달러를 버는 노동자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녀는 다달이 80달러를 더 받아내기 위해 이혼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이혼 이후에는 부양자녀 지원제도를 통해 매달 330달러를 지급받을 자격이 주어지게 될 참이었으니까요. 그녀는 이미 그런 짓을 저지른 두 이웃여자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가난의 이미지가 아닌 도덕적 타락의 이미지를 제시한다”고 텍사스 대학 오스틴 캠퍼스의 제레미 수리Jeremi Suri 교수는 말합니다. 그는 또한 이렇게 덧붙입니다. “여기서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는 레이건 레토릭의 전제는, 여자들은 무언가 잘못된 일을 함으로써 편모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용해먹기 좋은 표적이 된다. 명백히 잘못된 행동을 한 것처럼 보이는 여자를 예시로 들며, 따라서 ‘우리 정부는 이런 식의 부도덕적인 행위를 장려해서는 안 된다’라는 주장을 펴기란 쉬운 것이다.”

1960년대 후반 – 1970년대 초반

1960년대 후반 여러 대도시들에서 인종폭동이 터져 나오자 공화당원들을 비롯해 보수, 진보파 민주당원들까지도 존슨의 프로그램을 낭비이자 인종분쟁의 씨앗으로 여기기에 이릅니다. “1966년 이후 공화당원들은 디트로이트와 같은 지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동의 원인을 빈곤전쟁 탓으로 돌리며 비난했고, 그것이 사회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치안을 비롯한 여타 문제들을 부추긴다고 주장했다”고 카츠 교수는 설명합니다. 또한 수리 교수는, 레이건이나 골드워터 같은 보수파들이 “정부개입 이전에는 도시에 현재와 같은 불안감이 없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폭동문제들에 기를 쓰고 달려들었다고 말합니다. 수리 교수는 또, “그들은 상당수의 폭동이, 헤드 스타트(Head Start: 저소득층 미취학 아동 조기교육 지원제도)의 타켓이 된 연방주택단지 지역, 대다수 가정이 부양자녀지원을 받는 지역에 집중되어있다고 주장하려 들었다”고 덧붙이며, 그러한 현상은 또렷한 인과관계가 아닌 단순한 상호연관성으로 엮여있다고 언급했습니다.

1968년 공화당 대선 캠페인에 참가한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은 연설을 통해, 그가 사회적 불안과 연결 지은 존슨의 프로그램들을 축소시키겠다고 공공연히 맹세했습니다.

지난 5년 간 우리는 실업자와 도시민, 빈민들을 위한 정부의 프로그램들에 마구 휩쓸려왔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우리가 거둬들인 것은 절망, 폭력, 실패의 추한 수확물들 뿐입니다. 이제 우리의 적들은 이전과 똑같은 것들을 더 많이 제공하려 듭니다. 정부지원 일자리, 정부주택, 복지제도들에 수십억 달러를 더 들이겠다는 뜻입니다.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자 닉슨은 존슨의 계획들 중 상당수를 분권화했고, 그의 말에 따르면 사회적 불안을 키웠을 뿐인 정부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바로 모든 미국인에게 최저임금을 지급한다는 계획이었고, 그것은 관료제의 폐해를 줄이는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시도들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다트머스 대학 교수 아넬리즈 올렉Annelise Orleck은 그녀의 저서 <빈곤전쟁: 민중의 새로운 역사(1964-1980)>를 통해 닉슨이 ‘적어도 그의 레토릭에 관한 한 우파적 발상에 너무 얽매여’있었고, 민주주의 기반의 몇몇 지원법안들을 거부했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그는 집권 당시 ‘목표를 비현실적으로 높이’ 잡아 공공주택과 푸드 스탬프, 무상장학금 제도를 크게 확대하려 들었고, 결국 당시 사회적 프로그램들에 대한 연방정부의 지출은 세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그리고 1973년, 오일쇼크가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카츠 교수는 이를 ‘미국 정신에 있어 기념비적인 사건’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풍요와 성장,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갈 몫에 기반한 시대에 종말을 고하는 일종의 충격이었습니다.

MIT 교수 멕 제이콥스 Meg Jacobs 에 따르면 뒤따른 십 년 간의 에너지 위기는, 정부의 무능함을 물어뜯고 싶어하는 보수세력들에 의해 완전히 이용당했습니다. 에너지 위기는 평등한 권리와 사회 정책들에 관한 의견 양극화에 기름을 끼얹었고, 그때까지 운영되어오던 프로그램들을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수많은 제안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제이콥스는 “에너지 위기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더 이상 사회정책들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언급합니다. 실제로 오일쇼크는 레이건이 정부역기능을 주장하는 데 있어 증거물 제 1호 역할을 했습니다.

1980년대

1980년 백악관 입성을 위한 두 번째 도전을 하는 동안, “레이건은 기발하게도 ‘복지정부의 역기능에 대한 보수파들의 주장’과 시민권에 대해 계속되는 반발을 짝지었다”고 올렉 교수는 말합니다. 그는 미시시피 주의 네쇼바 카운티 페어에서 대선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인권운동가 앤드류 굿맨Andrew Goodman, 마이클 슈워너Michael Schwerner 그리고 제임스 체니James Chaney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밥 허버트Bob Herbert 는 이에 대해, “사건 혐의자들이 지역사회 안에서 그때까지도 보호받고 있는 상황이었고, ‘미시시피 버닝’은 곪아 터져가는 아픈 문제였으며, 백인우월주의는 여전히 팽배하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레이건은 그 페어에 모습을 드러낸 최초의 대선후보였고, 그가 “나는 미국의 인권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이런 식의 캐릭터 굳히기는 일부 여성들, 특히 흑인 여성들이 사회보장카드와 복지카드를 꼼수로 여러 장 챙김으로써 연간 15만 달러 이상을 받아내며 ‘복지여왕’ 노릇을 한다는 기존의 주장을 더 견고히 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논의에서 당신은 언제나 ‘여자’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이는 사실상 미혼의 흑인여성을 지칭한다”고 텍사스 대학 교수 제임스 갈브레이스James Galbraith 는 설명합니다. 또한 그는 “이는 미혼 백인여성을 겨냥한 시도들이 아니다… 이 ‘낙인찍기’는 가난한 여성, 특히 가난한 흑인여성을 타켓으로 삼고 있다”고 말합니다.

레이건 임기가 시작된 이후 그의 첫 예산담당관 데이비드 스톡맨은 ‘존슨의 빈곤전쟁 중 상당부분이 가차없이 버려져야만 할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발언했습니다.

올렉 교수는 당시 행정부가 ‘집권 초기에 푸드 스탬프와 무상장학금, 주택보조금, 실업수당, 학생대출에 책정된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고 언급합니다. 빈곤층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삼백만 명의 어린이가 학교급식 프로그램으로부터, 일백만 명이 푸드 스탬프 프로그램으로부터, 오십만 명이 학교아침식사 프로그램으로부터, 그리고 또 다른 오십만 명의 어린이가 현금보조 프로그램으로부터 내뱉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레이건은, 백인과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인의료보험제도나 사회보장제도와 같은 중산층 대상 복지후생계획은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대부분의 사회복지제도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정부의존도가 높아진다는 주장은 오직 가장 빈곤한 계층을 향해서만 겨누어진 것입니다. 두 번째 임기 동안 레이건은 사실상 빈곤퇴치 프로그램들에 대한 지출을 늘렸고, 근로소득세액공제제도를 눈에 띄게 확대했습니다.

1990년대

1996년 클린턴 대통령은 아이가 있는 빈곤가정에 보장소득을 현금으로 지급하는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이를 일시적이며 포괄적인 보조금 지원제도(이하 TANF)로 대체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연방정부는 각 주에 정액보조금을 지급했는데, 이는 ‘취업 우선’이라는 요구조건을 수반했습니다.

이 공화당 기반의 정책은, ‘미혼인 상태로 아이를 낳는 것은 개인적인 혹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경제적으로 현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잘못된 처사’라는 전제에 입각해있습니다. 보건후생부 장관 도나 E. 샬랄라Donna E. Shalala조차도 뉴스위크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이 문제를 도덕적인 차원으로까지 끌고 가고 싶진 않지만, 미혼인 상태로 아이를 낳는다는 건 확실히 그냥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 법안의 원안은, ‘가난한 미혼모들을 위한 정조교육에 5년 이상 2억 5천만 달러 이상의 예산을 책정한 것’이었습니다.

수리 교수는 “바로 이것, 복지의 정당성 공격이야말로 보수파 운동의 가장 오래가는 성공이었다”고 말합니다. 클린턴은 이 역동적인 변화를 인식하고 있었고, 빈곤층을 돕는 대신 이 기회를 계속 물고 늘어졌습니다. “당신은 60년대 인종차별적 레토릭에서 경제적 역량강화를 역설하는 레토릭으로의 전환을 목격한 것”이라고 수리 교수는 덧붙입니다. 오늘날 인종차별적인 언어가 직접 언급되는 일은 드물지만, 그것은 여전히 표면 아래에서 작용하며 빈곤전쟁 프로그램들을 서서히 분해하고 있습니다.

TANF가 처음 시행되었을 당시 빈곤아동의 수는 크게 줄었고, 인종 간 격차 역시 근소해졌습니다. 수리 교수는, 그러나 경제난 이후 ‘TANF는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증가한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으며’, 그로 인한 이익은 현재 37개의 주에서 ‘1996년에 비해 최소 20% 줄었다’고 지적합니다.

결과적으로 클린턴은 근로장려세제 대상자를 두 배 늘리고, 그것을 통한 최대이익을 세 배 늘림으로써 몇몇 빈곤층 옹호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2000년대

“부시가 대통령직에 올랐을 당시에는 복지개혁에 관한 이렇다 할 쟁점이 없었다”고 갈브레이스 교수는 말합니다. 또한 “2004년 정부지출이 필요해졌을 때 그들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서 의회가 무엇이든 통과시킬 수 있도록 했다”고 언급합니다. 여기에는 메디케어 파트 D(처방약보험)와 같은 거대한 새 의료보험혜택들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푸드 스탬프 프로그램 역시 2002년 당시 농업법을 통해 한번, 그리고 2008년에 또 한번 확대됐습니다. 부시는 그 법안에 반대했지만 공화당 상하 양원들이 민주당원들과 합세해 반대를 무효화했습니다. 부시는 또한 경기가 침체기에 접어든 이후 공화당원들의 성화에 못 이겨 2003년과 2008년 장기실업수당 확대법안에 서명했습니다.

이후 버락 오바마Barack Obama가 경제붕괴 한가운데 취임해 경기부양 종합대책을 통과시키고 정부의 역할을 확대하는 의료서비스 관련 법안을 추진하자, 보수적인 유권자단체 티파티(Tea Party)의 운동가들은 1960년대 골드워터와 레이건의 논리에 기대어 이러한 움직임에 저항했습니다. 인종문제를 다시 들고 나온 것입니다. 이 시기에는 시위도중 인종차별적인 색채를 띠거나 혹은 노골적으로 인종차별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급증해 미국흑인지위향상협회(NAACP)에서 이들이 인종차별주의자 집단과 제휴되어있다고 주장할 정도였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 오바마는 존슨의 계획을 따라가기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고, 오히려 빈곤층에 대한 논의의 판도를 바꿔놓은 공화당원들의 성공과 경제 위기에서 비롯된 단기적 손실들에 의해 많은 제약을 받는 상태였습니다.

‘그는 레이건 이후, 뉴트 깅리치Newt Gingrich가 몇몇 쟁점들에 대한 민주당원들의 논의를 완전히 바꾼 다음 워싱턴에 입성한 민주당 대통령’이라고 질라이저 교수는 말합니다. 또한 그는 “따라서 경제침체의 한가운데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최빈곤층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터놓고 강력히 주장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2012

미트 롬니Mitt Romney가 대선 캠페인 도중 47퍼센트의 미국인이 “정부에 의존적이다”라고 주장했을 때, 현 정부에 대한 공화당의 반발은 극에 달했습니다. 대선 며칠 후 이 전 메사추세츠주 주지사는 오바마가 ‘지나치게 관대했기 때문에’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다며 1960년대의 논리를 메아리처럼 반복했습니다. 롬니는 “대통령의 캠페인은 특정 그룹들에게 큰 선물을 주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그는 작은 부분들에도 큰 노력을 기했는데, 그 작은 부분들만 하더라도 다 합치면 천문학적인 액수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라며 덧붙였습니다.

롬니의 러닝메이트였던 폴 라이언Paul Ryan은 존슨의 빈곤전쟁 시절 짜여진 안전망 유지에 드는 비용을 대폭 삭감하여 여성과 유색인종에 큰 충격을 주게 될 지도 모르는 예산안을 작성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라이언의 말 대로라면 공화당의 예산안은, 빈곤선 138퍼센트를 웃도는 소득을 지닌 개인과 가정을 위한 저소득층 의료보장제도를 확대함으로써 수많은 노동빈민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법령(Affordable Care Act)을 폐지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1,200만 이상의 미국인들을 푸드 스탬프 프로그램으로부터 쫓아내는 한편 보육, 헤드 스타트, 직업훈련, 무상장학금, 주택 및 에너지 보조금에 책정된 예산도 크게 삭감해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프로그램들에 기대어 살아가는 이들 대다수가 반세기가 넘도록 빈곤전쟁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의 대상이 되어왔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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