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BI 칼럼|시대정신 기본소득] (2) 기본소득, 있는 그대로의 삶을 지지함 (여경)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에서 [시대정신 기본소득] 칼럼 연재를 시작합니다. 기본소득의 핵심 원칙은 ‘모두에게’ ‘조건없이’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당사자로서 기본소득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칼럼 시리즈에서는 각자가 가진 고민들을 통해 동시대의 문제를 짚어보고, 이로써 기본소득 논의를 재구성해보려고 합니다. – BIYN 사무국

사람은 노동을 해야만 돈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무엇이 노동이고, 누가 쓸모 있는 사람인가? 아마도 이는 기본소득의 주요한 철학적 근거들과 이어지는 질문일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질문을 구체적인 삶의 순간에서 맞닥뜨렸고, 그 순간들은 나로 하여금 기본소득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글을 쓴다. 내가 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지, 내가 생각하는 기본소득의 의의는 무엇인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첫 번째 질문을 마주한 순간은 인도를 여행하던 중에 찾아왔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인도에는 구걸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기차역이나 기차 안, 길거리, 차도에서까지도 걸인을 만날 수 있고, 그들은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그야말로 남녀노소를 불문한다. 처음에 나는 잔돈이 있으면 되도록 돈을 주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마주치는 빈도가 잦은 데다, 몇몇의 여행자들로부터 돈을 주는 건 저들이 자립할 능력을 갖지 못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조금씩 방어적인 태도를 굳혀갔다. 물론 지금 돌아와 생각하기로는 자립이나 장기적인 구제는 너무 요원한 일이고, 당장 오늘의 밥 한 끼 값이라도 저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당시 나는 ‘저들이 구걸에 의존하지 않고 일하게 하자. 그것이 일시적인 도움에 의존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사회에 속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일 것이다.’라고 스스로 합리화하고 더 이상 돈을 주지 않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차를 타고 이동을 하던 중에 한 소년을 만나게 되었다. 그 소년은 큰 봉투를 어깨에 지고 다니면서 한 손으로는 쓰레기를 주워담고, 다른 한 손으로는 걸레로 바닥을 닦으며 통로를 청소했다. 그러면서 칸마다 멈춰 서서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나는 통로 끝에서부터 그렇게 다가오는 소년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왜인지 ‘저 아이에게는 돈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고 다급하게 지갑을 뒤졌다. 공교롭게도 그 순간 나에게는 동전이 하나도 없었는데, 나는 (아마도 그 아이에게는 꽤 큰 액수일) 지폐를 쥐어주게 되었다. 그렇게 소년을 보내고 나는 나의 반응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 구걸하는 사람에게 한 번도 줘본 적 없는 액수를 덜컥 내민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나로 하여금 소년에게 돈을 주도록 만들었을까?

아마도 나는 그 소년이 ‘밥값을 했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돈을 받을 만한 일을 했다고. 그런데 돈을 받을 만하다는 건 뭘까? 왜 소년과는 달리 다른 걸인들은 돈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돈을 받으려면 최소한 바닥이라도 닦는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일까?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돈도 없이 굶어도 마땅한가? 한 인간이 자기 생명을 유지해 나가기 위한 최소 조건은 노동(혹은 노동가능성)인가? 인간이기 때문에,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는 ‘밥값’을 받을 수 없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그리고 내 안에 노동과 소득을 연결 짓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지 발견할 수 있었다.

또 이런 질문도 생겨났다.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밥값을 하는 것이고, 부지런히 걸어 다니며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밥값을 하는 일이 아닐까? 여기서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이 노동이고, 누가 쓸모 있는 사람인가? 이는 요즘 내가 맞닥뜨린 질문이기도 하다. 나는 돈을 버는 노동을 많이 하고 있지 않은데, 그러다 보면 가끔 내가 돈을 거의 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가 쓸모 없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돈을 벌고 돈을 쓰는 것으로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세상이다 보니, 사실 나는 하루하루가 충분히 가득 차 있는데도 단지 경제활동능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자주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과연 쓸모 있는 사람일까?

예를 들어, 하루 종일 집밖에 나가지 않고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고, 자주 멍 때리며 서있고, 목적도 없이 아무 길이나 무턱대고 걷고, 갑자기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고, 도서관에 가서 여러 책들을 곁에 쌓아두고 오래도록 뒤적이고, 그러다가 몇 문장을 겨우 끄적이고 밤에는 길게 일기를 쓰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쓸모 있는 사람인가? 이 사람이 하는 일은 돈을 받을 만한 노동인가? 당신이라면 이 사람에게 돈을 줄 것인가? 당신이 어떤 대답을 할 지는 잘 모르겠다.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일을 구하라고, 임금을 받는 노동을 하고 저런 건 남는 시간에나 하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저것이 일종의 노동이다. 나는 시를 쓰고 싶은 사람이고, 시를 쓰는 데 있어서 저런 시간들은 아주 소중하다. (그리고 꼭 시를 위한 것이 아니더라도, 나 스스로가 저런 시간들이 필요한 성향의 사람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라보고, 발견하고, 곱씹고, 기다리고, 숙성시키는 시간 없이는 좋은 문장이 탄생할 수 없다. 시는 많은 공백의 시간이 요구된다. 어떤 한 줄은 한 시간, 어떤 한 줄은 하루가 걸리기도 한다. 기약 없는 노동인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시가 쓸모 없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생산과정이 효율적이지도 않고, 결과물도 유익하지 않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이 돈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표면적인 쓸모 너머의 쓸모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당신은 아마도 기본소득에 좀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조건 없이 기본소득>(바다출판사,2014)의 저자 바티스트 밀롱도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가 집단적으로 유해하다고 명시한 행위를 제외하고는 모든 활동이 사회적으로 유용하다.”(108쪽) 따라서 어떤 일의 사회적 유용성을 비교하고 가치를 매기는 일은 무의미하다. 우리가 방바닥을 쓰는 것, 같이 사는 사람을 위해 밥을 하는 것, 친구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편지를 쓰는 것, 봉사활동을 하는 것, 심지어 휴가를 떠나 잘 쉬는 것까지도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 언제나 노동을 한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유익하고, 누군가에겐 무익할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우리는 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고, 살아있는 한 다른 사람에 대해 쓸모를 가지는 상호관계를 맺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사실 자체로 이미 우리는 존재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지금 사회는 쓸모와 노동에 대해 너무 협소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 같다. 그 범주가 좀 더 넓어져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쓸모와 노동, 그리고 소득의 관계 맺음에 대해 의심하고, 다른 관계를 상상해야 한다. 나는 기본소득이 그 작업을 도와줄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라고 믿는다. 나는 내가 무능력한 기분을 느끼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도 유용성 이전에 존재 자체로서 인정받고, 각자가 필요한 만큼 일하고, 자신의 가치와 성향에 어긋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글. 여경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회원. 적게 벌고 많이 쓰고(writing) 싶은 사람)

*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에서는 [시대정신 기본소득] 칼럼의 외부지면을 찾습니다. sec@biy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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