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BI 칼럼|시대정신 기본소득] (3) 3년차 편집 노동자, 기본소득을 지지한다 (히히)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에서 [시대정신 기본소득] 칼럼 연재를 시작합니다. 기본소득의 핵심 원칙은 ‘모두에게’ ‘조건없이’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당사자로서 기본소득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칼럼 시리즈에서는 각자가 가진 고민들을 통해 동시대의 문제를 짚어보고, 이로써 기본소득 논의를 재구성해보려고 합니다. – BIYN 사무국

 

이것은 쪼그라듦을 극복하고자 했던 평범한 사회 초년생의 이야기다.

2011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작은 신문사에 취직했다. 사장은 열정을 보이라고 늘 나를 다그치기만 했다. 두 달여 일하다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곳을 나왔다. 집에 손 벌릴 수 없어 바로 다른 신문사에 들어갔다. 여전히 일은 맞지 않는 옷 같았고 고달팠다. 매일같이 회사에 가기 싫어 울면서 일어나던 어느 날 아침, 나는 겨우 백수가 되자는 영웅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무직 상태가 되자마자 삶을 통째로 잡아먹어 버린 어마어마한 두려움이 찾아왔다. 나는 하루하루 통장 잔고와 함께 쪼그라들다가 결국 또 허겁지겁 취직하고 말았다. 다행히도 세 번째 회사인 출판사에서의 일은 잘 맞는 편이었다.

그렇게 만 3년의 사회생활을 지내는 동안 나는 꽤 변해 있었다. 늙었다는 게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날 늙게 했을까? 월급 백만 원에 야근을 밥 먹듯 했던 수습기간? 만성적인 운동 부족? 아홉 시간은 족히 의자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 편집자 생활? 불투명한 직업적 미래? 정말로 날 늙게 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권고사직한 동료들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때, 회사와 의견 충돌을 빚고 있던 친구를 모른 척했을 때, 회식에서 술에 취해 걸쭉하게 다가오는 손을 단호하게 뿌리치지 못했을 때, 상사의 눈치를 보며 후배들에게 필요 없는 야근을 시켰을 때, 내 자신이 싫은 그런 때들이 나를 늙게 했다. 세상은 졸렬하고 넉넉하지 않았으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죽는 날까지 점점 더 쪼그라들 것만 같았다.

 

다시 만난 기본소득

처음 기본소득이라는 말을 접한 건 아마 2010년께 <녹색평론>을 통해서였던 것 같다. 그때는 무심하게 지나친 그 개념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노동조합 운동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출판사에 입사한 지 1년 채 안 되었을까, 돌연 회사 동료가 권고사직을 요구당했다. 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고, 그 후 일말의 죄책감에 휩싸여 지역출판노조에 가입했다. 예쁘고 착한 책들을 찍어내는 대다수 출판사들의 뒷면이 끔찍한 노동착취와 성폭력 등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나마 사내 노조가 있는 출판사는 상황이 훨씬 나았다. 나도 얼른 회사에 노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회사 동료들의 반응은 다들 뜨뜻미지근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파업이라는 거의 유일한 무기를 쓰기에 너무나 취약하다는 사실이었다. 대체할 노동력은 넘쳐나는데, 회사와 달리 나와 동료들은 소득 제로의 상태를 버티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으며, 좁은 출판업계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히면서까지 이 회사에 오래 남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그때 떠오른 것이 어디서 들었던 기본소득의 어렴풋한 개념이었다.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주어지는 기본소득 제도가 있다면 소득 제로 상태에서 버티는 데 훨씬 유리할 것이었고, 지금같이 생계 소득의 100%를 쥐고 있는 고용주와의 노사 협상 테이블보다 훨씬 동등한 테이블을 꾸릴 수 있을 것이었다. 노동자를 마음대로 갈아치우고 쥐꼬리만 한 최저임금으로 야근에 특근까지 요구하는 게 일상화된 이 출판계 노동 현실만 봐도, 노동권을 지켜내고 확장하기 위한 노조 운동과 조건 없는 기본소득 제도는 굉장히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사회가 죽을 때까지 용돈을 준다면

내게 무소득 상태에 대한 두려움은 어마어마하다. 이 세계에서 무소득을 각오한다는 건 누군가에게 기생할 각오를 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회사에서 잘리더라도 부모님이 아닌 사회의 돈을 받으면 좋겠다는 사회안전망 수준에서 기본소득을 이해했다.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조건 없음’이 생각보다 함의가 큰 것이었다.

뜬금없지만 기본소득은 부모님이 그냥 주는 용돈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느껴지느냐면,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한테 돈을 준다는 부분에서다. 용돈을 줄라치면 진저리내며 피하는 나에게 부모님은 그냥 받으면 된다고, 자식이니까 주는 거라고 한다. 나를 불쌍하게 생각해서라거나 노후에 보상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나는 그 용돈의 형태로 드러난 부모님의 애정이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어떻게 하면 유무형으로 갚을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한다. 이것은 부담이지만 결코 빚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세계를 갖고 싶은가에 관한 문제다.

내가 존재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 사회가 날 받아들이고 평생 돈을 지급한다면, 나는 부담스러운 한편 어떻게든 애정과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상하게 발달한 자본주의적 쇼핑 욕구들이 줄어들고 지금은 눈도 안 마주치는 이웃들과 마치 두레가 있던 때처럼 정을 나누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나 내 동료들이 사장님과 서로 협박하지 않고도 각자의 요구 수준에 대해 이성적으로 협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스물여섯 살짜리 여자애가 회사 그만두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고 매일 아침 울면서 회사에 나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부모님 걱정 없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모험을 떠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다

아마 나는 계속 고단한 삶을 살아갈 테고 매일 밤 풀죽어 잠을 청할 것이다. 어떻게 기본소득 제도가 통과된다 하더라도 재원을 마련하기까지 꽤 지난한 일이 남아 있겠고 그동안 한층 더 늙겠지 싶다. 기본소득이 정착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폐단 폐습으로 점철된 비루먹은 노동환경들을 일소하는 것은 분명 아닐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후손들에게 물려줄 만한, 꽤 괜찮을 것 같은 세계의 이름을 알고 그걸 지지하는 것만으로도 훨씬 살맛난다. (혹여나 애를 가져도 나중에 덜 미안할 것 같고.) 무엇보다도 기본소득은 자괴감으로 쪼그라들어 하염없이 버티기만 하던 내 삶에 고개를 들어 미래로 갈 수 있는 어떤 방향을 하나 제시해 줬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고맙지만, 마지막으로 좀 더 바라자면 많은 사람들이 기본소득을 지지해서 한 십년 뒤에는 기본소득과 내가 어느 정도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글.히히 (훌륭한 만화 편집자를 꿈꾸고 있다.)

*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에서는 [시대정신 기본소득] 칼럼의 외부지면을 찾습니다. sec@biy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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