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BI 칼럼|시대정신 기본소득] (4) 하위문화의 존속 가능성과 기본소득 (박하다)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에서 [시대정신 기본소득] 칼럼 연재를 시작합니다. 기본소득의 핵심 원칙은 ‘모두에게’ ‘조건없이’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당사자로서 기본소득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칼럼 시리즈에서는 각자가 가진 고민들을 통해 동시대의 문제를 짚어보고, 이로써 기본소득 논의를 재구성해보려고 합니다. – BIYN 사무국

 

무슨 일이든 흥망성쇠가 있다. 당시에는 깨닫기 어렵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흥함과 망함의 변곡점이 어디였는지 어렴풋이나마 더듬어 볼 수 있는데, 여기 내가 겪었던 망함 사례 하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망했을 때는 술로 허함을 달래기도 했지만 이제는 흥망성쇠 그래프를 그리는 작업이 끝나 담담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5년이나 했는데 망했다

하위문화 중 일본 만화와 아니메를 위시하여 성장한 문화 산업이 있다. 이 문화에서 ‘산업’이 제거되고 다시 한번 아래로 내려오면 ‘동인계’라고 부르는 작은 판이 있다. 나는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이 판에서 ‘오리온’이라는 행사를 운영하는 팀에 몸담고 있었다. 오리온은 만화, 소설, 음반, 일러스트 등 다양한 창작물을 생산자가 직접 판매할 수 있는 마켓이었다. 동인계 생산물의 주축을 이루는 2차창작(패러디) 작품이 아닌 창작 작품만 참가 가능하다는 것이 오리온과 다른 동인 마켓과의 구별점이었다. 그 때는 ‘패러디’도 아니고 ‘독립출판’도 아닌 창작물이 참가할만한 행사가 없었던 판 내에서는 금세 유명세를 탈 수 있었다.

오리온은 7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행사를 그만두자고 결정하기까지 스탭들간에 수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가장 먼저 수입 문제가 있었다. 우리에게 ‘행사 오리온’은 ‘직업’이 아니었고, 각자의 생계와 진로를 고민해야 했다. 다음 행사를 열 만한 재정적 자립은 확보했었지만 행사 준비에 쏟아붓는 스탭들의 시간과 노력을 보상해 줄 수 없었다. 행사 당일에 진행을 돕는 일일 도우미들에게도 기껏해야 다음 행사 참가권과 고기파티를 열어주는 게 고작이었다. 물론 경제적 보상을 바라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이 판에 창작 작품을 판매할만한 마켓이 없다는 사실이 오리온이 만들어진 이유였고, 즐거움과 보람, 자기인정이라는 무형의 보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는 걸 행사를 6번이나 개최하고서야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이 판에서 본 한계가 보상 문제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현재 하위문화 씬은 확장의 가능성이 거의 끊겨 있다. 동인계의 경우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회사에 신입사원을 공급하는 인력 풀로서의 역할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씬 자체가 성장하여 하나의 흐름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래서 씬을 즐기는 인구 자체가 늘어나는 게 아니라, 정해져 있는 인구의 총량 안에서 서로가 생산자와 소비자의 턴을 번갈아 수행한다. 오리온은 행사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행사가 담을 수 있는 결이 다양해지기를 바랬다. 그래서 행사 외에 드라마 CD나 잡지를 제작하기도 했고, 서브컬쳐에 호의적인 기업과 협업을 꾀하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판 바깥의 사람들을 유입하는 데에도 실패했고 활동 범위를 넓히는 데도 실패했다.

 

망함은 예정되어 있을지 모른다

오리온을 찾는 이들은 대체로 8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말에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어릴 때 일본 버블시대에 만들어진 아니메나 실험적 대중문화를 접하고 자란 세대다. 그리고 동인계는 기본적으로 ‘작품을 구매한다’는 행위가 자연스러운 곳이다. 그래서 이 세대는 문화 생산물의 소비가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혀 있고 수용할 수 있는 작품의 스펙트럼이 넓다. 이 소비층이 있었기 때문에 행사를 일곱 번이나 열 수 있었지만, 회차가 거듭될수록 방문객의 반수가 고정방문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고정방문객은 고마운 존재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인구가 유입되어야 고인 물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오리온을 찾는 사람의 숫자는 600명에서 멈춰 버렸다.

경제 침체가 계속되는 현재, 우리는 리스크가 없도록 안전하게 설계된 문화를 본다. 국내의 양산형 아이돌과 과거의 영화를 끌어다 쓰는 레트로 열풍이 좋은 예이다. 이대로 ‘판’이 버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면 앞으로의 세대는 하위문화에 ‘판’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를 수도 있다. 이것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미래다. ‘동인계에는 이런 행사가 없으니 계속 했으면 좋겠다’는 조언을 여러 번 받았지만, 오리온은 달랑 3명이 꾸리는 행사였고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부담의 몫이 상당했다. 다른 판도 깊이 들여다보면 판의 규모 자체가 크지 않아 대체로 개인이나 소규모 팀이 부담을 짊어지고 있다. 그들이 결국 버티다 못해 포기하게 되면, 극단적으로 말해 판의 구심점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더욱이 판에서 놀만한 새로운 세대가 자라날 수 없는 환경이 계속된다면? 어쩌면 나는 오리온을 하면서 이 디스토피아의 시작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기본소득이 있었다면 망하지 않았을까?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태어났을 무렵 문화적, 경제적 호황이 있었음은 알고 있다. 기본소득이 시행된다면 그런 호황이 다시 올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경제가 살아날 수 있을까?(내가 살아있는 동안?) 기본소득이 시행된다고 해도 그 수혜가 문화까지 다다르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기본소득은 가장 먼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여야 한다. 돈으로 묶였다는 이유로 복종관계로까지 확장된 갑을관계, 소득의 격차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낙차와 열등감, 생존에 대한 위기. 결국 각자도생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 이 문제들은 내가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화폐를 얻을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집세를 낼 수가 없다. 이제 겨울이라서 밖에서 자면 얼어죽는다.

물론 사회에 돈이 충분히 돌면 문화 산업은 자연스럽게 팽창하고 다양한 시도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대중 문화와 상위 문화가 몸집을 불리면 자연스럽게 하위 문화도 덩치가 생긴다. 상위문화를 추종할 수도 있지만 거부하거나 비판할 수도 있고, 상위문화와는 별개로 마이너한 지점을 갖고 움직일 수도 있다. 지금은 문화계 전체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판’들의 크기도 심각하게 쪼그라들어 있는데, 위에서 말했듯 충분한 문화적 경험을 할 수 없는 세대가 주류가 된다면 하위 문화의 씬이 살아날 수 있을지 더더욱 장담할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상위 문화의 상황도 좋지 않다. 2012년 ‘문화예술인 분야별 100만원 이하 수입 비율’ 통계(2012 문화예술인실태조사)를 보면 건축과 대중예술을 제외한 문학, 미술, 사진, 연극, 영화, 무용, 음악 분야에서 수입이 100만원 이하인 종사자 비율이 50%를 훌쩍 뛰어넘는다. 심지어 문학은 91.5%다. ‘위로 올라가더라도 먹고 살기 힘들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무언가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 시도 자체에 ‘생존’이라는 리스크가 걸린 셈이다.

 

기본소득은 비빌언덕

몇 번의 망함을 겪으니 내게도 기본소득은 비빌 언덕처럼 느껴진다. 나는 오리온을 해서 돈을 벌지 못했고, 오히려 돈을 벌어야 할 시간을 오리온에 투자했었다. 이것이 내가 감수해야 할 리스크였다. 하지만 기본소득 같은 제도가 있었다면, 돈을 투자하지는 못하더라도 시간을 좀 더 쏟을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더 큰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무언가를 더 시도했었을지 모른다.

갓 청소년을 벗어난 젊은이들에게는 부모님이 ‘비빌 언덕’이 되어 준다. 여행을 다녀오거나, 정말 잉여 같은 도전 등등 부모님이 언덕의 역할을 해 줄 수 있다면 자유롭게 시도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역할은 본디 사회가 해야 하는 기능이다. 이 역할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현재의 사회보장제도와 기본소득 간의 차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기본소득의 제 기능에 대해 논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은 기본소득의 가시화일 것이다. 나도 지금보다 다양한 분야에 기본소득이 알려지기 바라는 마음으로 굳이 서브컬쳐 판에서 겪은 경험을 끌어다 이 글을 썼다. 나는 앞으로도 돈 안 되는 짓들을 벌릴 텐데 기본소득이 이를 위한 언덕이 되어주기를 희망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보다 많은 이들이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정치에서도 사회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큰 이슈로 자라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결국에는 모든 이에게 언덕이 되어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희망이란 밝은 빛을 보고 걸어가는 게 아니며, 길은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차차 생긴 것이라는 루쉰의 말을 새삼 되새겨 본다.

 

글. 박하다 (그래픽 디자이너. 일벌리기 자격증 2급 보유. pinen@naver.com)

*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에서는 [시대정신 기본소득] 칼럼의 필자와 외부지면을 찾습니다. sec@biy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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